THE JOURNAL

“저 위에 정상이 있어요. 지금은 가려서 안 보이지만.” 스티븐 연의 손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로스앤젤레스 북동부에 위치한 산 가브리엘의 존스 피크가 보인다. 일요일 아침의 봄 햇살이 스며든 깃털 같은 구름을 휘감은 자태로.
작은 모임이 진행 중인 숲속의 작은 공터를 지나 걷다 보니, 두툼한 패딩 재킷을 걸친 노부부가 보인다. 바닥에 깐 담요 위에 손수 만든 딤섬이 올려져 있다. 소담한 먹을거리와 오붓한 장면이 미소를 짓게 만든다. 스티븐 연의 동네를 둘러싼 모습은 분명 할리우드의 눈부신 거리, 그리고 데이비드 호크니가 화폭에 담은 화사한 로스앤젤레스와는 거리가 있다. 지난 5년간 정상을 향해 걸어온 그의 길은 연무가 내리 앉은 세상처럼 조금은 희뿌옇게, 또 은은하게 그 형체를 드러낸다. 터치 한 번으로 볼 수 있는 구글 맵스 대신 주머니에 꼭꼭 접어둔 종이 지도와 함께, 거친 산악 지형을 따라 한 발짝 한 발짝 등반한 정상의 길.
스티븐 연은 블루 그레이 스웨트셔츠에 블랙 조거 팬츠를 걸치고, 아디다스(adidas)의 하이킹 슈즈를 신었다. 스타일링하지 않는 짧은 머리를 매만지며 그는 ‘매일 밤 배우의 역할을 벗고 아내와 두 아이에게 충실한 남편이자 아버지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고, ‘로스앤젤레스에서의 촬영이 처음인 만큼 어려움도 있었지만, 점점 적응해 가고 있다’고 말한다. “개인적인 삶에서도 항상 일의 영향을 받는 것 같아요. 마음에 휘둘리는 대신 의지대로 다스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말이죠.”

내성적이고 인간적인 그는 역설적이게도 좀비 아포칼립스 드라마인 <워킹데드 The Walking Dead>에서 이름을 알렸다. 이후 그는 뛰어난 작품성으로 칭송받은 여러 프로젝트를 통해 감독이 사랑하는 배우로 거듭났고, 아시아계 미국 배우로서는 처음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부문에 노미네이트됐다. 작품 고르는 눈이 까다롭기로 유명하고 상업적인 할리우드 영화에 자주 출연하지는 않지만, 분명 그는 지금 정상을 향하고 있다. 비록 그의 가장 큰 고민이 스스로를 다스리는 것이라 해도.
"현명한 사람은 아니에요. 하지만 생각과 거리를 두는 법을 배웠죠. 예전엔 생각이 감정을 지배했거든요. 요즘은 어느 정도 통제가 가능해졌어요.” 그의 말을 곱씹으며 조용히 걷다 보니 녹음이 우거진 오솔길이 등장했다. “출발해 볼까요?”
구불구불한 오르막을 오르다 스티븐 연이 차기 작품에 관해 이야기한다. 조던 필 감독의 <놉 Nope>으로 전작인 <겟 아웃 Get Out>과 <어스 Us>처럼 호러의 장르적 한계를 확장한 영화이다. 줄거리는 국가 기밀급 보안으로 인해 들을 수 없었다. “미안해요, 정말 말해주고 싶은데 스포일러 없이 어디까지 말해줘야 할지를 모르겠어서...” 그는 거듭 사과한다. 영화는 미스터리한 실종과 에일리언 침략(적어도 그렇게 보이는)에 대해 다룬다. 흥미로운 가설은 영화 제목인 NOPE이 ‘지구의 것이 아닌(Not of Planet Earth)’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역할을 맡은 스티븐 연의 활약이 기대된다.
조던 필은 스티븐 연의 역할이 ‘중심적’이며, ‘영화의 핵심 테마를 대표하는 인물로 뛰어난 연기를 펼친다’고 말한다. 스티븐 연은 영화에 합류한 후 조던 필을 도와 주도적으로 캐릭터의 윤곽을 잡았다. “조던의 사려 깊은 디렉팅 덕분에 내 방식대로 캐릭터를 해석할 수 있었어요. 개성 있고 입체적인 캐릭터를 연기하기 위해서는, 내 몸에 맞게 역할을 테일러링하는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캐릭터에 대한 정보는 예고편에 등장한 모습이 전부다. 카우보이 모자, 볼로 타이 그리고 새빨간 수트 차림으로 쇼장에 서 있는 모습. “모자와 타이 등 극적이고 과장된 옷차림은 하나의 가면처럼 작용해요. 페르소나 같은 거죠. 의상을 벗는 순간 그 속의 캐릭터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줄 테고요. 배우로서의 저도 마찬가지죠.”
그는 ‘연상엽’으로서 대한민국 서울시에서 태어나 4살 무렵 가족과 함께 캐나다 서스캐처원으로 이민을 갔다. 이후 트로이, 미시간을 거쳐 디트로이트 교외로 이사했다. 부모님이 좋아했던 의사의 이름을 따 스티븐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된 것도 이곳이다. 십 대 때 기타를 연주하기 시작하면서 동네 한인 교회 찬양 팀의 밴드 리더가 되며 처음 무대에 선 셈. 교회 장기 자랑에서 인큐버스의 <드라이브>를 연주했다고 한다. 대학에서는 심리학을 전공했으며 의대 진학을 위해 뇌과학을 중점적으로 공부했다. 또, 학창 시절 즉흥 코미디 극단에서 활동했는데, 졸업 이후 시카고로 이주해 아시아계 미국인 코미디 그룹인 스터 프라이데이 나이트에서 연기했고, 마침내 존 벨 루시, 댄 애크로이드, 길다 래드너, 티나 페이, 에이미 포엘러, 스티븐 콜베어, 조던 필 등 수많은 유명 인사를 배출한 더 세컨드 시티 극단에 합류하게 됐다.
하지만 미국에서 한국계 배우가 맡을 수 있는 배역은 한정적이었다. 맡겨진 역할 대부분은 <아직은 사랑을 몰라요 Sixteen Candles>의 악명 높은 인종차별적 캐릭터 ‘롱덕동’의 업데이트된 버전에 불과했기 때문. 스티븐 연이 브로드웨이의 한 관객참여형 연극에 참여했을 때를 예로 들자면, 외국인 교환 학생으로서 어눌하게 대사를 읽을 것을 요청받았다고 한다.

“관객에게 재미를 선사한다는 측면에서 실망감을 떨쳐버릴 수 있었어요. 코미디로서 즐길 수 있었죠.”
2009년 로스앤젤레스로 이사한 후 <빅뱅 이론 The Big Bang Theory>의 단역을 맡은 후로 채 6개월이 지나지 않아, 그의 연기 인생에 커다란 전환점이 찾아온다. 바로 <워킹데드>의 주요 배역을 차지한 것. 피자 배달부 ‘글렌 리’가 그 캐릭터다. 여섯 시즌에 걸쳐 그는 팬들이 가장 사랑하는 캐릭터로 자리매김했을 뿐만 아니라, 스토리의 중추적인 역할을 차지했다.
스티븐 연은 <워킹데드>를 사랑했던 동시에 극 중 캐릭터가 무거운 부담감으로 다가왔다고 시인한다. 백인 여성과의 로맨스부터 좀비를 물리치는 강한 ‘아시안’ 남성으로서의 캐릭터가 가지는 대표성 말이다.
“때때로 그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는 듯했죠. <워킹데드>의 초석을 다질 수 있었다는 것이 영광이에요. 계속해서 혼자 무게를 짊어지는 대신 뒤이어 힘을 합친 다른 이들에게 바톤을 넘겨줬을 뿐인 거죠. 그렇게 쇼를 떠나게 됐고요.” 그렇게 시리즈의 시즌 7 글렌은 처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그는 침착하고 신중하게 다음 역할을 찾았다. 글렌의 유명세 덕을 보려는 TV쇼와 영화 프로덕션의 러브콜을 모두 거절한 체. “한창 인기 있을 때 상업적인 성공 가도를 좇지 않았던 제가 어리석어 보였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워킹데드> 덕에 제게 들어온 배역은 그전에도 맡을 수 있었던 역할들이었죠. 새로울 게 없었어요.” 그가 새로움을 찾아 발을 돌린 곳은 다름 아닌 한국이었다. <워킹데드> 하차를 앞둔 시점에서 그는 한국을 찾아 봉준호 감독과 박찬욱 감독을 만났고, 그로부터 2년 후 봉준호 감독으로부터 이메일을 받게 된다. 스티븐 연만을 위해 그의 새로운 영화인 <옥자>의 동물권 극단주의자 K라는 역할을 만들어 놨다는 소식. 이후에도 부츠 라일리 감독의 <쏘리 투 보더 유 Sorry To Bother You>, 이창동 감독의 <버닝>에서 흥미로운 캐릭터를 맡게 된다.
이어, 스티븐 연은 영화 <미나리>에 변화에 가속을 올렸다. <미나리>는 정이삭 감독의 자전적 영화로서 미국 아칸소주 교외, 낯선 땅에 뿌리 내리기 위한 한인 가족의 애환을 담았다. 스티븐 연은 총괄 프로듀서 겸 주연 배우로 작품에 참여했다. 그가 연기한 제이콥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지만, 낯설고 척박한 이국의 환경에 부딪히는 인물이다. 작품을 통해 그는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고, 영화는 작품상을 포함한 총 6개 경쟁 부문 후보에 올랐다.

“물론, 인종에 상관없는 배역을 제안받기도 해요. 하지만 여전히 ‘나’로서 캐스팅되지 않을 때가 많죠. 아시아 배우기만 하면 누구라도 상관없을 것처럼요.”
도로 위 실랑이와 그 후 복수전을 다룬 넷플릭스의 <성난 사람들 Beef>의 스티븐 연은 분명 여타 아시아계 배우로 대체 불가한 존재감을 펼쳤다. <놉>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전에 없던 새로운 영화예요. 조던 필 감독은 인종의 대표성을 다루는 것 이상으로 영화의 지평을 넓히고 싶어 하죠.”
조던 필은 이전 <환상특급 The Twilight Zone> 에피소드에 스티븐 연을 캐스팅했던바, 그의 강점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스티븐 연은 캐릭터를 놀랍도록 정확하고 날카롭게 연기하죠. 작품에 인간적인 무게를 실어주는 배우예요.”
조던 필은 이어 ‘훌륭한 배우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지만, 이번 촬영에서 다시 한번 놀랐다’고 덧붙였는데, 이는 <놉> 촬영 중 동료 배우 케케 파머가 벽에 걸린 포스터를 언급하며 즉흥 연기를 펼쳤을 때 스티븐 연이 즉시 디테일을 살린 연기를 펼친 것에 대한 것이었다. “오래전 둘만 있을 때 흘러가는 식으로 얘기한 것들을 모두 기억하고, 연기에 녹여낸 거죠. 배역을 준비하는 데 그가 얼마나 큰 노력을 기울이는지 알 수 있었어요. 감독으로서 설치한 역할의 레이어보다 한층 더 깊이, 어쩌면 무수하게 많은 겹으로 이루어진 캐릭터의 세계를 엿볼 수 있었어요. 이건 배우만이 할 수 있는 일이고요.”

등산하는 가족이 왼쪽으로 지나간다. 스티븐 연은 좁고, 발길이 많이 닿지 않은 오른쪽 길로 걸음을 옮긴다. 걷다 보니 로스앤젤레스가 한눈에 보이는 벤치가 보인다. 아직 구름에 가려진 정상, 그와 나는 벤치에 앉아 뷰를 감상한다. 몇 분이 흘렀을까, 그가 말한다. “내가 떠 있다는 것 그리고 아직 안전히 착지할 땅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주는 힘이 있어요.”
하산하는 길 지나가던 등산객이 스티븐 연을 알아보고 ‘<워킹데드>에 나왔던 사람 맞죠?’라며 셀피를 요청한다. 어쩌면, <워킹데드>는 그에게 성장의 둥지이자, 떠나야 하는 둥지였다. 둥지를 떠난 그는 비상하고 있다. 희뿌연 실안개 속에서 조용하고 우아하게.
“요즘 드는 생각인데, 하나의 문턱을 넘기 위해서는 내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놓아버려야 해요. 예를 들자면, 강을 건너기 위해 정성 들여 나룻배를 만들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육지에 다다른 순간, 배는 이제 아무런 쓸모가 없어요. 목적지로 향하는 길에 무거운 짐이 될 뿐이죠. 아쉬운 마음은 뒤로 하고, 계속 나아가야 하니까요.”